조관우의 복장에는 2-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알고 보니 돌돌싱인 김성수에 이어 두 번째 돌돌싱 멤버라는 의미였습니다.
탁재훈은 이에 "너무 축하드린다. 이혼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다. 이제 도약해야 한다"고 응원하며 박수를 받았다.
이후 조관우는 "1년 안에 헤어진 연인에게 연락이 온 적 있냐"는 물음에 조용히 손을 들더니 "이혼 후 전처에게 연락 온 적이 있다"며 "정리가 덜 돼서 돈 보내라고 했다. 위자료 몇 달 밀렸더니 바로 보내라고 연락왔다"고 고백했답니다.
- 프로필 이력 경력
본명 조광호 나이 출생 1965년 8월 3일(57세)
고향 출생지 광주광역시 광산구
활동 시기 1982년 ~ 현재
학력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미술학과 중퇴
배우자 장복신(이혼) 손혜련(이혼)
가족관계 아버지 조통달 할아버지 조상선 할머니 박초월 자녀는 슬하 3남 1녀
(아들 조휘, 조현, 조환 딸 조하은) 종교 개신교
1965년 판소리 명창이었던 조통달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관우의 가문은 대대로 국악을 해 온 집안으로서 지난 1950년에 월북을 한 국악 판소리 창극 작사가 조상선이 대한민국 서울 본토에 남긴 차남(次男)이었던 아버지 조통달 이외에도 조관우의 이모할머니이자 최초의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예능보유자 중 한 명인 박초월 또한 그 가계의 유명한 국악인이랍니다
1994년 1집 앨범 《My First Story》가 130만 장의 판매 기록을 올리며 가요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당시로서는 남성이 내는 고음의 가성이 매우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데뷔하자마자 명성과 비난을 동시에 얻었답니다.
특히난도 1집 타이틀곡 〈늪〉은 유부녀를 짝사랑하는 내용의 가사로 일부 종교계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앨범 재킷에 얼굴을 가린 사진을 싣고 방송 출연을 자제했기 때문에 '얼굴 없는 가수'로 불리기도 했답니다.
이듬해인 1995년 발매한 리메이크 앨범 2집 《Memory》는 300만 장이 팔리며 조관우의 가장 성공한 음반으로 남았다. 이 앨범으로 인해 조관우는 리메이크의 대명사로 여겨지게 됐다. 이 앨범은 대중음악평론가들에 의해 90년대를 대표하는 50대 명반의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여기에 수록된 〈꽃밭에서〉는 정훈희의 곡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늪〉과 함께 조관우의 대표곡으로 꼽힌답니다.
하지만 1, 2집이 연속으로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자와의 불리한 계약으로 인해 조관우 본인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으며 이런 상황은 1996년 3집 《My 3rd Story About》을 발매하고 소속사를 옮긴 후에야 개선될 수 있었다. 타이틀 곡 〈영원〉을 앞세운 3집은 13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조관우는 이 때부터 전국 투어 콘서트 연속 매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답니다.
조관우父국창 조통달 "보듬어주지 못해 미안해 - 2021. 6. 10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조관우 아버지이자 국창 조통달의 진심을 알곤 오열, 47년만에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부자의 모습이 뭉클함을 안겼다.
9일 방송된 KBS 2TV 예능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가수 조관우가 출연했습니다.
이날 게스트로 조관우가 출연, 수준급 실력의 가야금 연주로 등장했다. 조관우는 국악까지 섭렵할 수 있던 이유에 대해서 “할머니가 인간문화재 명창 고 박초월, 할머니 뒤를 이어 아버지도 판소리로 인간 문화재 조통달 국창이다”고 대답, 태어날 때부터 매일 듣는 것이 국악이었기에, 가야금도 손에 저절로 익혀졌다고 했다. 이에 모두 “보통 가문이 아니다”라며 놀라워했답니다.
이어 인사동에 모인 이유에 대해 조관우는 자신이 태어난 곳이라면서도 “하지만 어릴 때 추억을 떠올리긴 싫다”고 해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조관우는 “아버지가 해외공연 때문에 2~3년은 거의 외국에 계셔, 부모님이 6살에 이혼해 외롭게 지냈다”고 아픈 과거를 전했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오랜만에 오면 공항도 못 나가, 홀로 동네에서 7시간 넘게 기다린 적도 있다”면서 오랜만에 봤음에도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할 만큼 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라 떠올렸다.
이후 “선생님을 만나며 마음을 열리기 시작했다”는 조관우는 “아버지라 부르고 싶던 선생님, 50여년이 흘러도 또렷이 선생님 성함을 기억한다, 홍석관 선생님”이라며 선생님을 그리워했답니다.
10살 조관우에게 선생님이 유일하게 낯설지 않고 기댈수 있었던 사람이었다는 것. 학교로 이동해 당시 추억을 회상했다. 게다가 어머니와 만남 후 초등학교 6학년 때 첫 가출을 했다는 그는 “무작정 버스를 탔고 중국집에서 취칙시켜달라고 해, 당시 학교 명찰을보고 중국집 사장이 학교에 신고했고 아버지가 날 찾으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시 아버지 눈물을 태어나 처음 봤다, 심지어 아버지가 자신을 때리라고 해 어쩔 수 없이 때렸다, 지금은 내가 그런 아버지한테 그럴 수있나, 난 아버지만큼 용기있던 사람이 아니었다”며 자신을 돌아봤답니다.
한 바탕 추억을 돌아본 그는 “가슴아팠지만 그 시절이 날 지켜준 버팀목이었다”면서 “모든 걸 잊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 그 분이 홍석관 선생님이었구나 싶다”며 선생님을 향해 더욱 깊어진 그리움을 전했다
단서를 찾기위해 이동한 끝에, 가장 연관이 깊은 학교를 찾았고, 홍석관 선생은 현재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도 입원했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답니다.
이후, 조관우는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모교로 향했다. 정문에서 손을 흔들며 조관우의 본명인 “광호”란 이름을 부르며 선생님이 나타났다. 홍석관 선생은 조관우를 보자마자 “눈물이 난다 47년이 지났는데 날 기억하다니”라면서 “멋있게 컸구나”라며 감동했다. 그러면서 “조광호(조관우 본명)를 기억한다, 작았지만 다부졌던 아이, 성적도 음악만 좋았다”며 조관우를 정확하게 기억했습니다.
이때, 조관우의 아버지이자 국창 조통달이 아들을 위해 영상 편지를 보냈다. 조통달은 “엄마아빠가 제일 필요한 시기, 같이 있어주지 못하고 보듬어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훌륭하게 커줘서 자랑스럽고 고맙다, 앞으론 새롭게 나아간 아들이 되길 바란다”며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고, 조관우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진심이 담긴 편지에 눈물 흘렸답니다.